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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코스톨라니(André Kostolany), 파리 증권가에서 '코스톨라니의 달걀'을 그리기까지

객주21일 전인물해외 0 9
목차 · 4개 칸
  1. 앙드레 코스톨라니(André Kostolany)는 자기 재산을 숫자로 밝힌 적이 없어서 얼마를 남겼는지는 추산할 수 없음.
  2. 대신 그가 1971년 함께 세운 자산운용사 피두카(FIDUKA)는 지금도 뮌헨에서 남의 돈을 굴리며 그의 이름을 단 증권 세미나를 열고 있음.
  3. 출발점은 맨손이 아니라 부다페스트 부잣집 막내라는 배경과, 파리 증권가에서 자기 돈으로 처음 모은 200달러였음.
  4. 그의 책들을 인용해 삶을 따라간 2020년 독일 평전 『앙드레 코스톨라니, 알아야 할 모든 것』(Alles, was Sie über André Kostolany wissen müssen)에 따르면 그는 1906년 2월 9일 부다페스트에서 주류 공장을 하던 아버지의 넷째이자 막내로 태어났음.
  5. 그는 자기 부모를 "부유한 대부르주아"라고 불렀음.
  6. 1919년 공산당이 헝가리에서 권력을 잡자 가족은 몇 달 동안 빈으로 피했음.
  7. 열세 살이던 그는 피란민이 몰려 암시장이 선 빈에서 폴란드 마르크와 체코 코루나를 바꿔 가며 매번 10%쯤 남겼다고 책에 적었음.
  8. 그는 이 일을 두고 "열세 살에 외환 딜러가 됐다"고 했음.
  9. 대학에서는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했고 꿈은 예술평론가였음.
  10. 판을 바꾼 건 아버지의 학교 친구였음.
  11. 파리에서 중개 회사를 하던 그 친구가 아들을 자기 밑에 보내 쓸모 있는 걸 배우게 하라고 권했다고 함.
  12. 증권 중개인은 손님의 사고파는 주문을 대신 넣어 주고 수수료를 받는 사람임.
  13. 그렇게 1924년 그는 일을 배우러 다시 파리로 갔음.
  14. 월급 200프랑이 호텔 방 한 달 값과 똑같아서 모자라는 돈은 아버지와 형이 보태 줬다고 함.
  15. 첫 일은 손님 주문서를 들고 거래소 안을 뛰어다니는 심부름꾼이었음.
  16. 1927년 견습을 마친 뒤로는 월급 없이 성사시킨 거래의 수수료로만 사는 중개인으로 여러 회사에서 일했음.
  17. 자기 돈으로 한 첫 거래는 회사 사환이 귀띔한 광산 주식이었고, 오르는 장이라 금세 두 배에 팔았다고 함.
  18. 다음으로는 혁명 뒤 휴지가 됐다는 제정 러시아 시절 주식을 샀는데 그것마저 올라 손에 200달러가 생겼음.
  19. 그는 아무 논리 없이 다 오르는 게 허세처럼 보였다며 "모두가 오른다고 걸면 나는 정확히 그 반대로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고 적었음.
  20. 공매도는 주식을 빌려 먼저 팔았다가 값이 떨어진 뒤 싸게 사서 갚는 방법으로, 값이 떨어질수록 버는 약세 투자에서 가장 흔한 수단임.
  21. 그리고 1929년 10월, 뉴욕에서 시작된 폭락이 유럽 증시로 번지면서 그의 약세 쪽 판돈이 열매를 맺었음.
  22. 그는 "매일 저녁 또 한 번 이긴 기분이었다"고 그때를 적었음.
  23. 그 뒤로도 큰 금융 그룹들이 잇달아 무너지며 그는 돈을 더 벌었음.
  24. 스물다섯 살에 이미 운전기사를 두고 스위스 생모리츠의 고급 호텔에서 몇 주씩 묵었다고 함.
  25. 하지만 그는 친구와 동료가 모두 망한 사이 혼자 지갑이 두둑했다며 "나는 혼자였다"고 털어놓았음.
  26. 그의 마지막 큰 약세 투자는 성냥 재벌 이바르 크뤼게르(Ivar Kreuger)의 회사였고, 1932년 3월 크뤼게르가 파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는 이 일로 더 흔들렸다고 평전은 적었음.
  27. 1940년 그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피했고 1948년 유럽으로 돌아왔음.
  28. 평전 목차는 그의 큰 거래로 대공황 때의 약세 투자, 전쟁 중 원자재 거래의 큰 이익과 손실, 전후 독일 국채, 크라이슬러 주식을 꼽음.
  29. 평전이 그의 "가장 큰 한 방"으로 꼽은 건 전쟁 뒤 헐값이 된 옛 독일 국채를 사들인 일이었음.
  30. 독일이 신용을 되찾으려면 결국 갚을 거라는 데 건 거래였다고 전해짐.
  31. 1957년 그는 기자라는 두 번째 일을 시작했음.
  32. 독일 경제 잡지 《캐피탈(Capital)》 칼럼이 그의 얼굴을 알렸음.
  33. 1969년 뮌헨의 한 투자 행사에서 그를 처음 만난 고트프리트 헬러(Gottfried Heller)는 그 칼럼으로 이미 얼굴을 알고 있었다고 했음.
  34. 헬러는 독일 사람들에게 수십 년치 투자 경험이 모자란다고 쓴 그의 칼럼을 읽고 그 빈틈을 함께 메우자고 제안했음.
  35. 그렇게 1971년 둘은 뮌헨에 자산운용사 피두카를 세웠음.
  36. 자산운용사는 고객의 돈을 맡아 대신 투자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회사임.
  37. 1974년 말에는 독일에서 처음 나온 이런 꼴의 개인 투자자용 증권 세미나인 '코스톨라니 증권 세미나'를 열었음.
  38. 헬러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예순넷에 새 일을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어 갔고 세미나는 100번을 넘겼음.
  39. 그는 스스로를 "증권시장의 떠돌이 설교자"라고 부르며 "나는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한다"고 말하곤 했다고 함.
  40. 책도 꾸준히 냈음.
  41. 독일 국립도서관 목록에서 가장 이른 그의 책은 프랑스어 원고를 옮겨 1961년에 낸 『이것이 증권시장이다』(Das ist die Börse)임.
  42. 독일 국립도서관 목록을 보면 『코스톨라니의 증권 세미나』(Kostolanys Börsenseminar)는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출판사와 판을 바꿔 가며 열 번 넘게 다시 나왔음.
  43. 1990년에는 '카페 탁자에서 한 강의'라는 부제를 단 『코스톨라니의 증권시장 심리학』(Kostolanys Börsenpsychologie)이 나왔음.
  44. 그가 평생 붙든 생각은 시장을 움직이는 게 숫자보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었음.
  45. 한국어판 『투자는 심리게임이다』에는 "단기적 그리고 중기적으로 심리학은 증권시장의 90%를 결정한다"는 문장이 나옴.
  46. 그래서 코스톨라니가 꼽은 시세의 공식은 '추세 = 돈 + 심리'였다고 헬러는 적었음.
  47. 그는 이 가운데 돈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돈이 없으면 음악도 없다"는 헝가리 집시 악사들의 말로 설명했다고 함.
  48. 『투자는 심리게임이다』의 출판사 소개는 "주식투자에서 정보는 곧 파산이다"라는 그의 말도 옮겼음.
  49. 버핏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도 시장을 날마다 기분 따라 값을 부르는 동업자 '미스터 마켓'으로 그려 같은 생각을 보였음. 비슷한 글 워런 버핏 1987년 주주서한 (버크셔 해서웨이)
  50. 투자자에게 필요한 네 가지는 돈·생각·인내·행운이고 독일어 머리글자를 따서 '4G'(Geld·Gedanken·Geduld·Glück)라고 부름.
  51. 출판사 요약으로는 빚내서 투자하지 말고, 생각할 시간을 갖고, 자기 결정을 지킬 인내를 가지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운이 따라야 한다는 것임.
  52. 돈이 많은 사람은 투기해도 되고 적은 사람은 하면 안 되며 없는 사람은 해야 한다는 말도 그의 것으로 평전 첫머리에 실렸음.
  53.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코스톨라니의 달걀'임.
  54. 마지막 책의 한국어판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에도 같은 이름의 꼭지가 있음.
  55. 주식시장이 오르고 내리는 한 바퀴를 달걀 모양으로 그린 그림으로 흔히 소개됨.
  56. 한 바퀴는 오르는 쪽과 내리는 쪽으로 나뉘고, 쪽마다 바로잡힘·따라감·지나침의 세 국면이 있어 모두 여섯 국면임.
  57. 이 달걀을 돌리는 건 자기 돈으로 사서 흔들리지 않는 '소신파'와 남 따라 사고파는 '부화뇌동파'라는 두 무리의 투자자임.
  58. 바닥에서는 아무도 주식을 쳐다보지 않을 때 소신파가 조용히 사 모으고, 꼭대기에서는 뒤늦게 뛰어든 부화뇌동파 손에 주식이 다 모인다는 게 그림의 줄거리임.
  59. 그래서 남들이 겁에 질려 팔 때 사고 너도나도 몰려들 때 팔라는 게 그의 처방으로 소개됨.
  60. 출판사도 내려가는 마지막 국면과 오르는 첫 국면에 자기 돈으로만 사서 기다리라는 게 그의 비법이라고 요약함.
  61. 한국에는 이 달걀 위아래에 금리 고점과 저점을 놓고 주식과 채권을 갈아타는 풀이도 있지만 마지막 책의 목차에서 확인되는 공식은 '돈 + 심리 = 트렌드'임.
  62. 그 목차에는 '중앙은행: 금리의 독재자들'이라는 꼭지가 따로 있어, 목차로 보면 금리는 '돈' 쪽에 들어감.
  63. 그가 즐겨 든 비유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남자로, 평전에도 '개를 데린 남자'라는 꼭지가 따로 있음.
  64. 개는 주인보다 앞서 달려 나갔다가 뒤로 처지기를 되풀이하지만 결국 주인과 같은 곳에 닿는다는 이야기로, 주인은 경제이고 개는 증권시장이라고 소개됨.
  65. 그 꼭지의 부제는 '길게 보면 늘 오른다'이고, 그는 "길게 보면 증시 시세는 지금까지 늘 올랐다"고 말했음.
  66. 우량주를 자기 돈으로 사고 수면제를 먹은 뒤 몇 년 푹 자라는 말도 남겼음.
  67. 그는 1999년 9월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음.
  68. 몇 주 전 파리로 찾아간 헬러가 독일 기술주 시장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를 묻자 그는 "독자들에게 참여하지 말라고 권하는 게 아니라 금지한다"며 "피바다가 될 것"이라고 답했음.
  69. 헬러는 그 말이 여덟 달 뒤에 맞았다고 적었음.
  70. 2026년 10월 지금도 피두카는 그 세미나를 이어 가고 있고, 다음 회는 10월 24일 뮌헨에서 열림.

🍿 여담

  1. 그의 첫 주식 투자는 고등학교 때였음.
  2. 학교 친구들과 만든 문학·음악 모임의 회계를 맡았던 그는 아버지가 전화로 해운 회사가 뜬다고 하는 말을 엿듣고 모임 돈으로 '오세아닉(Oceanic)' 주식을 샀음.
  3. 주가가 올라 그 돈으로 그토록 갖고 싶던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을 샀는데, 며칠 뒤 알고 보니 오세아닉은 해운 회사가 아니라 생선 통조림 공장이었다고 함.
  4. 형 에머리히(Emmerich)는 1차 대전 직전 포도 덩굴을 묶는 야자 섬유(라피아) 선물을 빚내서 샀다가 값이 무너져 아버지가 돈을 대신 갚았음.
  5. 그 뒤로 집에서 '라피아'라는 말은 금기가 됐고, 어린 그는 꿈꾸던 빨간 자전거를 받지 못했다고 적었음.
  6. 경제학자를 평생 놀린 그는 사실 경제학도 공부했다며 "졸업장은 잠긴 서랍 맨 아래에 두고 생각도 안 하려 한다"고 털어놓았음.
  7. 파리에서 묵은 호텔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묵었다는 안내판을 보고 골랐다고 함.
  8. 마지막 책에서 그는 식당에 가면 웨이터가 권하는 메뉴는 대개 빨리 팔아 치우려는 것이라 시키지 않는다며 증권사가 권하는 종목의 90%도 마찬가지라고 했음.

💰 어떻게 벌었나

남과 반대로 걸기 → 칼럼과 책 → 세미나

  1. 코스톨라니가 판 건 시장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눈이었고, 처음에는 그 눈으로 직접 사고팔아 벌었고 나중에는 그 눈을 잡지 독자와 책 독자와 세미나 손님에게 팔았음.
  2. 직접 하는 투기는 1929년처럼 크게 벌 때도 있었지만, 친구들이 다 망하는 걸 보며 그는 스스로 흔들렸음.
  3. 글과 세미나는 이름이 쌓이는 자산이라서, 칼럼으로 알린 이름이 피두카의 손님과 그의 이름을 단 세미나로 이어졌음.
  4. 세미나는 1974년 말 첫 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0번 넘게 열렸음.
  5. 책은 한 번 써 두면 다시 찍어 팔 수 있어 레버리지에 유리하고, 『코스톨라니의 증권 세미나』는 1986년부터 2000년까지 판을 바꿔 가며 열 번 넘게 다시 나왔음.
  6. 그래서 몸이 하나인 중개인이 수수료로 버는 돈과 달리, 그가 떠난 뒤에도 그의 이름은 피두카의 세미나와 한국어판 투자총서로 계속 팔리고 있음.
  7. 아쉬운 점은 남과 반대로 건 돈이 남의 몰락에서 나왔다는 것임.
  8. 1929년 폭락으로 크게 벌었지만 친구와 동료가 모두 망한 사이 "나는 혼자였다"고 털어놓았고, 마지막 큰 약세 투자였던 크뤼게르의 회사는 크뤼게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그를 더 흔들어 놓았음.

관련 링크

평전 견본과 목차 2건, 회사 사이트 2건, 독일 국립도서관 목록 1건, 한국어판 책 소개 3건, 독일·오스트리아 금융회사 소개 글 2건, 보도 2건을 확인해 정리함. 그중 직접 볼 만한 것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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